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쳇 베이커 (문단 편집) === 몰락의 시작 === 1956년 4월에 쳇은 릴리앙과도 결별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디트로이트]]에서 만난 헬레마 앨리와 두 번째 결혼식을 올려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는다. 하지만 이제 쳇의 인기에서 중요한 기반이 되었던 서부 재즈는 상업적인 가치가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쳇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마일스 데이비스]]는 메이저 음반사 콜럼비아와 전속 계약을 체결했고, 동시에 프레스티지에 자신의 하드밥 시기 최대 걸작으로 일컬어지는 '~in' 시리즈 네 장을 연속 취입하면서 쳇을 [[듣보잡]]으로 만들 만큼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아직 쳇과 전속 계약을 맺고 있었던 퍼시픽 재즈는 쳇에게 좀 더 '뜨겁고 격렬한' 음악을 녹음할 것을 주문했고, 쳇은 곧 그 해 7월에 'Chet Baker & Crew' 라는 앨범으로 이 주문에 답했다. 덕분에 쳇은 그 동안의 유약하고 섬세한 이미지를 일신시켜 다시 재즈 비평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을 비롯해 많은 밴드 멤버들이 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약을 안하고 버티고 있던 지미 본드, 대마초빠이기는 했지만 다른 약은 안하고 있던 빌 러프보로가 이런 막장 분위기를 못이겨 밴드에서 탈퇴했다. 그 해 가을에는 쳇과 마찬가지로 약쟁이였다가 수감된 뒤 약을 끊고 있었던 알토색소포니스트 아트 페퍼와 협연한 'Playboys', 여전히 복잡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러스 프리먼과 협연한 'Quartet: Russ Freeman and Chet Baker' 를 취입했다. 1957년 2월에는 플레이보이즈 올스타 재즈 어워드에서 재즈 트럼펫 부문 2위에 올랐고, 수상 기념으로 쟁쟁한 선배 뮤지션들과 4개월 일정의 대규모 순회 공연을 진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공연을 시작한 지 불과 1주일 뒤 [[필라델피아]]에서 대마초가 발각되는 바람에 밴드 멤버였던 테너색소포니스트 필 어소와 함께 체포되었다. 쳇과 어소는 프로모터였던 조 글레이저가 보석금을 내줘서 풀려나기는 했지만, 결국 남은 일정 동안 쳇의 밴드는 공연 기회를 모두 박탈당했다. 쳇은 약쟁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당하다가 빡쳐서 나가버린 드러머 앨버트 히스 대신 마일스 데이비스의 퍼스트 퀸텟에서 드러머로 활동했던 필리 조 존스를 영입했는데, 필리 역시 엄청난 약쟁이였고 쳇과 함께 틈만 나면 약을 해댔다. 하지만 필리가 자기 돈을 떼먹으면서 몰래 약을 산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바로 해고했고, 이후 드러머 없이 공연을 해야 하는 개막장 상태가 되었다. 결국 이런 불안정한 공연 일정도 여름에 끝났는데, 할리우드의 재즈 클럽 피콕 레인에서 연주하던 중 몇 년 전 멀리건에게 콩밥을 먹이는 데 일조한 약쟁이 사냥꾼 오그레이디와 맞닥뜨리면서 도망치듯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가야 했다. 여기서 다시 [[뉴욕]]으로 가 일거리를 찾았지만, 이미 뉴욕은 쳇을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게다가 얼마 안되는 돈도 모두 마약 사는 데 탕진했고, 같이 데려온 헬레마가 이런 모습을 견디지 못해 아들 체스니 아프타브와 함께 디트로이트의 친정 집으로 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었다. 쳇은 하는 수 없이 뉴욕 주변의 고만고만한 클럽에서 가끔 들어오는 연주 제의를 소화하며 근근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퍼시픽 재즈에서 옛 동료 멀리건과 재결합을 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돈이 급했던 쳇은 이 제안도 받아들였지만, 이미 서로를 불신하고 있던 상황에서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오기는 힘들었다. 이어 버브 레코드에서도 소속 아티스트인 테너색소포니스트 [[스탄 게츠]]와 듀엣 앨범을 제안했는데, 쳇은 이것도 수락했지만 남은 것은 결국 자신 뿐 아니라 게츠의 이력에도 [[흑역사]]로 남을 졸작 뿐이었다. 이렇게 삐걱대던 음악 활동 외에도 검문에서 헤로인이 걸리는 등 이곳저곳에서 위기가 닥쳐왔고, 재판을 피하려고 마약 중독 치료를 신청해 가까스로 징역살이는 면했다. 여전히 마약 살 돈이 필요했던 쳇은 [[리버사이드 레코드]]에서 제안한 계약을 받아들였고, 쳇은 여기서 보컬 앨범인 'Chet Baker Sings-It Could Happen to You' 와 'Chet Baker in New York', 보컬리스트 자니 페이스와 협연한 'Chet Baker Introduces Johnny Pace' 를 연이어 발표했다. 하지만 평단의 반응은 여전히 차가웠고, 매상도 별로 좋지 않았다. 그나마 [[리버사이드 레코드]]에서 1958년 연말에 네 번째로 취입한 'Chet' 은 음악적으로는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그렇다고 전성기인 1950년대 중반 만큼의 판매량 달성에 성공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쳇은 여느 약쟁이 뮤지션들과 마찬가지로 약값을 벌기 위해 음반사에 끊임없이 선불 개런티를 요구해 음반사들과 심한 갈등을 빚는다. 심지어 음반사 창고를 털어 음반을 훔쳐가 팔거나 [[수표]]를 위조하는 등의 범죄 행위까지 서슴치 않아 음반사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에 체포되기까지 한다. 결국 1959년 3월에 쳇은 마약 거래 현장을 급습한 경찰에 의해 또 체포되었고, 마침내 1953년에 멀리건이 그랬던 것처럼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뉴욕의 악명 높은 교도소인 라이커스 아일랜드에 수감되었다. 이후 형기를 두 달 남겨두고 가석방되었고, 리버사이드와 맺은 계약을 끝내기 위해 'Chet Baker Plays the Best of Lerner & Loewe' 라는 앨범을 하나 더 내놓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